영적 수련 프로그램


신탁(Trust)의 영적 수련 프로그램은 최초의 영적 수련생들의 도착과 함께 1973년에 시작되었다. 그들과 이후의 몇 십 년 동안 들어온 영적 수련생들은 만달리와 일상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 이 협회는 영적 수련생들 중 첫 번째 집단의 훈련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메헤라바드(사마디 근처), 메헤라자드(비러벳 바바의 거주지) 또는 아흐메드나가르(신탁이 관리되는 곳)의 사무소에 살았다. 우리와 함께 일함으로써, 이 첫번째 영적 수련생 그룹은 비러벳 바바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비러벳 바바와 함께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서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곧 만달리의 '상점'(바바가 그분 자신의 작업이라고 말한)이 닫힐 것이므로, 현재의 영적 수련생들과 앞으로 올 영적 수련생들을 돕기 위해 영적 수련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비러벳 바바 자신도 신탁을 만들었고, 그는 신탁 하의 다른 목적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것이 그 분의 지시이며, 그분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말고 누가 그의 소망을 이루려 하겠는가? 첫 번째 영적 수련생 그룹은 신탁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당연히 이 작업은 미래 세대의 영적 수련생 여러분과 함께 계속될 것이다. 그대들은 오직 바바의 소망들을 충족하기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신탁 증서에 쓰여진대로)인 동시에 가슴 속으로 비러벳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구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영적 수련이란 무엇이며, 누가 영적 수련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영적 수련은 가장 개인적인 일이다. 이것은 그대 자신의 가슴 속, 러버와 비러벳 사이의 친밀하고 신성한 관계다. 오직 비러벳만이 내면으로부터 누군가를 수련하거나 깨울 수 있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이 수련이 언어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비러벳 바바는 그의 신탁 증서에서 ‘영적 수련’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적 수련을 위한 어떤 외부적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신탁의 의무이다. 영적 수련 프로그램인 이 체계는 헌신적인 영혼들이 이곳에 와서 그들의 삶을 그분께 바치고, ‘신탁 증서’에 명시된 그분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


신탁의 영적 수련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먼저 영성이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영성은 의식을 통한 종교적인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 영성은 그 주장에서 점차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대의 거짓된 자아를 감히 지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단순히 강의를 듣거나 영적인 책을 읽는다고 해서 거짓된 자아를 없앨 수는 없다. 완벽한 스승이나 아바타만이 거짓된 자아를 지우는 방법을 보여줄 수 있다. 비러벳 바바는 항상 신을 사랑하고, 스승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에게 항복하는 것이 거짓된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비러벳 바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아흐메드나가르에 온 바바 러버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당신들은 바바와 함께 있었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은 옳다. 그분은 더 이상 육체적인 형태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항상 내적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분은 그를 갈망하는 가슴 안에서 항상 발견할 수 있고, 내면에서 그분의 침묵의 안내를 들을 수 있다. 비록 우리 만달리가 바바와 함께 있었고 그 분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그분을 따르기 위해 그분이 진정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의 가슴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그분과 함께 지내든 아니든, 그분에 대한 우리 가슴의 정직한 사랑은 그분에게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러벳 바바의 무덤에 가면,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그저 절만 하는가? 절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엎드려 절하는 것은 그대의 거짓된 자아의 머리를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비러벳 그분이 그대에게 바라는 바를 기꺼이 정직하게 가슴으로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가슴으로 그분의 즐거움을 의식한다면(그분의 무덤에서 절할 때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아바타가 더 이상 육신으로 있지 않을 때에도 진정한 영적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가슴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대를 사랑, 희생, 자아-소멸로 이끌 것이다. 그대 가슴 안의 이러한 안내를 다시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정말 필수적이다. 이것은 거짓된 자아의 주장으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가슴 속 비러벳의 안내를 어떻게 듣는 지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슴 안에서 비러벳에 대해 정직하다면, 그분의 소망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솔직함이 그대를 인도할 것이다. 가슴의 충동은 그대를 그분에게 향하게 하는 가벼운 감촉을 느끼는 것처럼 간단하다. 그러나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진다면, 자신의 거짓된 자아의 무게 외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분에게 정직하지 않다면 마음은 항상 그러한 잡음을 낼 것이고, 거짓된 자아가 빈약한 참나에 대해 자신을 주장할 것이다. 참나는 그대의 마음을 진실(Truth)로써 자극하지 못하고, 침묵의 증인으로만 남을 것이다."


마음의 목소리는 가슴의 목소리와 매우 다르다. 처음에는 마음(실제로 잡음을 만들어 내는 것)을 듣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대가 마음에 좌지우지될 때, 그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방해를 받게 된다. 그때는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가슴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라, 가슴은 언제나 그대를 사랑, 희생, 자아-소멸로 이끌 것이다. 마음은 오직 그대를 욕망을 성취하도록 이끌 뿐이다.


마음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진실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으며, 그 둘을 넘어선다. 이것이 일상 생활에서 의미하는 바는, 그대가 옳다고 우기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 그것은 거짓된 자아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당화는 지성의 산물이며, 정직하고 신실하게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지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적 수련은 그대의 가슴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마음의 활동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마음의 활동을, 원치 않는 손님처럼 대해야 한다.


영적인 길은 너무 좁아서 참나만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참나와 거짓 자아는 나란히 걸을 여지가 없다. 거짓된 자아가 참나를 따르도록 만들어야, 영적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대의 거짓된 자아를 노예로 삼아,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안의 신을 섬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대가 이런 태도를 갖게 되면 우선 딱딱한 거짓 자아는 부드러워지고, 그 다음에는 서서히 먼지가 될 것이다. 먼지처럼 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 년 간의 신에 대한 정직한 노력과 의존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삶의 환경이 딱딱한 거짓 자아를 망치로 두들겨서 부드럽게 하고, 서서히 먼지처럼 되어 가도록 해야 한다. 마스터의 발 밑에서는 반드시 먼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모든 마스터들이 말해왔다.


비록 거짓된 자아가 당신을 항상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겠지만, 거짓된 자아가 '섬김의 통달'(Mastery in Servitude)이라는 삶을 향한 그대의 노력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충실히 지켜야 한다. ‘섬김(보리심)의 통달’ 아래서 사심 없는 삶을 사는 것도 영적 수련 프로그램의 또다른 차원이다. 사심 없는 봉사는 세상에서 행해지는 사회 봉사와는 다르다. 사회 봉사는 세상에 선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가 ‘신탁 증서’의 목적을 충족시키려고 활발한 행위 안에서 봉사할수록, 이름이나 명예에 아무런 관심 없이 거짓된 자아를 무효화시킬 것이다.


비러벳 바바는 '섬김의 통달'(Mastery in Servitude)이라는 말을 그의 묘지 입구 위의 좌우명으로 내걸었다. 이 간단한 구절(그대를 인도하는 빛이 될 수 있는)을 통해 그분은 육신으로 계시든 아니든, 그분에게 이르는 길을 알려주신다. 그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돌이켜보며, 늘 그분의 묘지 위의 말씀을 참조할 수 있다.


비러벳 바바께서 직접 서명하신 ‘신탁 증서’에는, 영적 수련의 대상이 있다. 증서에서는, ‘신탁 설정자(바바)가 신탁 회원들에게 이따금 줄 수 있는 지시 사항에 따라 영적 깨달음을 위해 살아가는 바바 러버들의 훈련을 위한 시설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비러벳 바바가 육신을 벗은 후, 우리 만달리는 1974년 ‘선언 증서’를 통해 비러벳 바바(신탁 설정자)의 지시를 기록했다. 이 지침들은 10개 항목으로 만들어졌다. 첫 번째 항목은 영적 훈련의 기초가 되는 것에 대해 직접 언급한다: "삶, 특히 아바타 메허 바바와 동반자들이 평범한 세속의 활동 가운데서 항상 포기(renunciation)하고 초연한(detachment) 예를 보이며 실천했던,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속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삶’(New Life)이라고 불린 삶의 방식에 따라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훈련을 위한 시설을 조직, 관리, 건립하는 것은 신탁 이사회의 책임이다.


영적 수련생을 돕기 위해 어떤 지침이 필요한 지 신탁에서 고려할 때, 비러벳 바바가 ‘새로운 삶의 노동 단계’에서 동반자들에게 직접 내리신 조건들이 수련생의 마음과 가슴이 진실을 향한 삶을 영위하도록 초점을 맞추는 데 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안내일 뿐이다; 이 지침들은 그대가 삶 속에서 유지해야 하는 정직한 사랑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라. 사랑이란, 내가 설명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그대 모두가 신을 사랑하고 각자의 가슴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섬김의 통달’ 아래서 신탁의 목적을 충족시킴으로써 그분의 뜻에 계속 헌신한다면, 메허 바바의 ‘새로운 삶’의 노동 단계의 조건 아래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자신의 가슴 안에서 그대를 향한 비러벳 바바의 소망을 듣는다면, 영적 수련생으로서의 그대는 영원한 비러벳인 아바타 메허 바바에 의해 직접적으로 안내될 것이다.


신탁의 ‘영적 수련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영적 수련생으로서 그대가 이해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요점을 말하고자 한다:


• 비러벳과 러버의 책임과 의무

• 신성한 의지와 신성한 소망,

• 의식과 의례


이러한 주제들은 언제나 많은 질문들을 야기하고,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영적 수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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