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수련 프로그램


진실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이지만, 이 일원성(하나됨, Oneness)의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다수성(Manyness) 즉 환상의 놀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비러벳 바바의 이 위대한 연극 안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대들 각자가 영원히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 신과 함께인 존재. 이 연극에서는 비러벳 바바가 감독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산스카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우리의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 상태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분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연극에서 배우들은 감독이 그들에게 준 역할을 연기한다. 그때 감독은 그들이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지도한다. 배우들이 감독의 말을 들을 때, 감독은 배우들이 최고의 능력으로 연기할 수 있게 돕는다.


하지만 이 창조(Creation)라는 드라마에서 배우인 우리는 감독을 잊어버리며, 그 대신 우리를 이끄는 것은 우리의 인상(impressions)이 된다. 인상들은 우리가 새로운 인상을 모으는 방식으로 역할을 하게 만들고,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인상들을 경험하기 위해 다시 한번 태어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창조의 드라마는 계속된다. 성경과 코란에는 환생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실 영혼은 태어나지 않고 죽지도 않기 때문에, 환생 같은 것은 없다. 만약 환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라는 꿈 속의 일일 뿐이다. 그 꿈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환생도 거짓인데, 환생은 꿈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드라마는 수많은 작은 꿈이 담겨 있는 아주 긴 꿈이다. 어떤 새로운 꿈이 시작될 때 탄생이라고 하고, 그 꿈이 끝날 때 죽음이라고 한다. 꿈은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는 꿈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러벳 바바의 지시에 따르면 그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점점 들어오면서, 꿈은 점차 힘이 줄어들게 된다. 아래의 짧은 이야기는 꿈이라는 환상과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힘을 보여준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잠을 잔다. 그는 자신이 왕이며, 큰 왕국을 가진 아주 강력한 왕이 된 꿈을 꾼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을 돌보지 않고, 삶을 마음껏 즐긴다. 그는 계속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을 등한시하면서, 자신만의 안락을 위해 돈을 쓴다. 이제 이 꿈에서 그는 작은 왕국을 가진 또 다른 왕을 발견한다. 이 왕은 매우 정직하다. 그는 더 강력한 왕이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어떻게 등한시하는 지를 본다. 그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하다가 강력한 왕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여, 그 왕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달라고 아주 정중히 부탁한다. 강력한 왕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몹시 분노한다. 그래서 힘이 약한 왕에게 감히 그런 충고를 하려고 다시 한 번만 편지를 보내면, 전쟁을 일으켜 무찌를 거라고 경고한다.


힘이 덜 센 왕은 편지를 받는다. 그는 힘센 왕에게 큰 군대가 있기 때문에 싸워봤자 헛수고가 될 거라고 느끼면서도, 이제는 강한 왕을 상대로 싸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비록 그가 전쟁에서 죽는다 해도, 적어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의무는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힘이 더 약한 왕을 이길 거라는 완전한 자신감을 가지고, 힘 센 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그러나 힘이 약한 왕은 백성을 돕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 그의 군대는 매우 충성스러우며 또한 매우 단호하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힘이 강했던 왕은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힘이 덜 센 왕과 그의 군대의 위대한 결의를 본다. 만약 자신이 잡히면 죽임을 당할 거라고 느낀다. 그래서 그는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도망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말에 올라 타서 오랜 동안 길을 간다.


이 때 두 왕의 꿈을 꾸고 있던 남자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아직 어느 정도 꿈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자신이 숨을 매우 거칠게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천천히, 그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본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 단지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을 꾸는 동안, 그는 두 왕과 왕국들, 전쟁을 일으킨 그들의 성격 등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모든 것은 그에게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깨어나자 전쟁터와 두 왕,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일상은 꿈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모든 것은 정말 진짜처럼 보인다. 우리의 일상적인 드라마는 우리가 자신의 산스카라의 감독을 받기 때문에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감독(신)의 지시에 주목하기 전에는, 그들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 꿈에서 깨어날 수도 없다. 신의 지시 아래서, '그분을 찾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갈망함으로써, 그대는 인상(산스카라)의 드라마로부터 깨어나려고 노력하는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다. 


영적 수련에는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이 있다. 외적인 면은 신탁 증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의 그대의 사랑의 노력이다. 내적인 면은 그렇게 하도록 그대에게 영감을 주는 가슴 속 사랑이다. 그대의 행동이 가슴 속 사랑의 반영일 때, 그대의 영적 수련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영적 수련생으로서의 그대의 삶은 마치 공연과 같다. 어떤 공연에서나 그렇듯, 그대의 의무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 부분만 제외하고는, 관객도 외적, 내적인 성질은 겸비하고 있다.


영적 수련의 외적인 면은, 자신이 그 일을 함으로써 비러벳 바바의 소망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온 가슴을 다해 일함으로써 신탁 증서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돕는다. 그대가 사랑스럽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일원성(하나됨)'의 정신으로부터 행동하고, 이름, 명성 등에 대한 거짓된 자아의 충동을 절제하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참나를 지탱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가장 내밀한 의도를 외적으로 행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그대의 영적인 삶은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됨'의 정신으로 비러벳을 섬기지 않을 때, 그대의 외적인 수행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 할 것이며 외적인 일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결코 비러벳을 기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조화의 감정에 있어서는 결코 타인의 마음을 속일 수 없다. 외적인 조화는 '하나됨'밖에 없는 내면의 세계를 비춘 것이기 때문에, 가슴은 속일 수 없다. 가슴은 오직 진리만을 받아들이는 청중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기쁘게 하기 어려운 청중이다. 그대의 가슴이 은밀한 동기를 갖지 않고 '하나됨'의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할 때에만, 진정한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대의 의무를 외적으로 수행하는 데는 당신에게 할당된 일이 완료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임무인 감독자를 필요로 한다. 신탁 위원, 부서장, 부서 관리자 등 감독자가 되는 것이 의무와 책임인 사람들은 자신도 '영적 수련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감독자로서의 역할은 외적인 것이다. 그대의 관심사는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일이 만족스럽게 이뤄지는 것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대의 감독하에 있는 영적 수련생들은 때때로 그들의 임무에 실패할 것이고, 미래에 그들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교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는 비러벳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그대가 관리하는 위치에 있든 아니든,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하나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거짓된 자아의 인상(impressions)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대가 어떤 역할에 있든지 상관없이 봉사를 수행하면서 내면의 영적 자유를 배우게 되며 내면의 영적 자유는 거짓된 자아를 희생하여 진정한 자아를 지탱한다. 그래서 외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이 내적 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이것이 영적 수련의 또 다른 내적 측면이다.


당면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수행이 필요하지만, 사실 외적인 수행은 그대 사랑의 표현 수단이다. 일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와는 상관 없이, 오직 그대의 사랑이 비러벳과의 필수불가결한 연결 고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대의 실제 생활, 즉 내면의 삶에 대한 완벽한 청중은 비러벳 바바이다. 비러벳에 대한 가슴의 움직임은 오직 그분의 기쁨만을 위한 내면적 행위이다. 이 내적인 행위는 신탁에서 하는 격렬한 행위 동안에도 그대 가슴의 비밀로 지켜진다. 그러나 그분의 내적인 지시를 잘 듣고 따를 때에만,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행할 수 있다. 오직 개개인 각자만이 비러벳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누구도 이 성스러운 책임 - 러버와 비러벳 간의 사랑의 친밀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온 세상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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