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1
영적 수련생으로서 그대는, 평등과 하나됨(Oneness) 사이에는 다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요즘 세상은 평등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 매우 고귀한 생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든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비현실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평등이라는 생각은 거짓된 것이다. 이원성에 기반한 환상은 다양성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제한적이어서 거짓된 것들을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일상에서 그대가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 시도는 질투와 증오를 낳게 되고, 실제로는 차이를 만들어왔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내면의 하나됨을 추구한다면, 신을 더욱 더 사랑하고 싶어질 것이다. 내면의 하나됨을 추구하면 일상생활에서 동정심과 사랑이 생기고, 그러한 차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평등은 환상 안의 외적인 것에 기초하기 때문에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내면의 하나됨은 영(spirit)의 반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다음 사건은 바바가 평등이라는 생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의 특정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상황을 조정했는지 보여준다. 돈킨 박사는 새로운 삶(New Life)의 동반자 중 한 사람이었다. 동반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걸을 포함하여 새로운 삶의 모든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 기간 동안,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돈킨이 구걸하러 갔을 때, 사람들은 이 영국인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뒤에 틀림없이 어떤 속임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종종 그는 구걸하러 나가서 학대를 당하곤 했다.
모든 동반자는 야외의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다. 모기가 많아서 돈킨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를 본 바바는 어느 날 비쉬누에게 시장에 가서 모기장을 사 오라고 하셨다. 모든 동반자 앞에서 바바는 그 모기장을 돈킨에게 주었다. 바바는 말했다. “돈킨에게 이 그물을 주니, 그대들은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가? 돈킨은 내가 모기장을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모기가 너무 많은 야외에서 자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바바는 왜 내겐 안 주고 저 사람에게 모기장을 주나?’라고 생각하지 말라. 돈킨은 새로운 삶의 조건을 따르고 있다. 그 사람도 당신과 똑같고,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대들은 모기장 없이도 잠을 잘 수 있고, 돈킨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그가 잠을 자지 못하니 나는 그에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 그래서 이 모기장을 그에게 주는 것이다. 모기장을 어떻게 사용할 지는 그에게 달려 있다. 그에게는 침대도 없고, 모기장을 고정시킬 물건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기장을 그대들에게 주면, 침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바바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셨다.) 그러니 잘 알다시피, 편애는 없다. 돈킨은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모기장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 예에서 그대는 바바가 어떻게 한 사람의 필요를 돌보고, 평등의 생각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실례를 보게 된다. 만약 그대가 하나됨의 느낌을 갖고 있다면, 새로운 삶을 사는 와중에 돈킨에게 무언가 행해진 것에 기뻐할 것이다.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등의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느낀다면, “왜 그에게 모기장을 주었을까? 왜 나에게는 안 주셨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영(spirit)은 상실되고, 가슴의 삶이 아닌 마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다른 인상(impressi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기 얼굴도 다르다. 그대는 자신의 인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다르게 행동한다. 인상이 존재하는 한,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차이점, 이러한 인상을 없애는 것이다. 그 인상이 지워질수록, 내면의 하나됨의 경험은 더 많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신을 사랑할수록, 세상에 속박되어 있는 산스카라(인상)로부터 계속 해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지만, 평등의 추구는 속박을 증가시킨다.
영적 수련생으로서 그대의 삶의 목표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본분을 다할 때 가슴의 관심은 세상의 내적 구조를 향해야 한다. 신을 사랑할수록 내면의 하나됨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대의 삶이 메허 바바를 향해 한 방향으로 향하게 될 때만, 가슴 안에서 이 하나됨을 느낄 것이다. 삶의 목표는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어느 날 비러벳 바바의 은총으로 그분은 그대와모든 이, 모든 것과의 영원한 하나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하나됨과 평등 사이에 차이의 세상이 있듯이, 겸허(humility)와 겸손(modesty)에도 차이가 있다.
영적 수련회, 아쉬람 등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되려는 시도에서 오직 겸손한(modest)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착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됨의 느낌이나 참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내적 이해조차 얻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외적인 쇼이다. 때로는 그들의 약점이 그들을 압도하며, 단지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게 하기 위해 겸손한 척 한다. 비러벳 바바는 우리가 겸손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겸허하고(humble) 자연스러워지기를 원하셨다. 겸손(modesty)으로부터 행동할 때, 그대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겸허(humility)로부터 행동할 때, 그대의 행동은 내면에서 정직하게 느끼는 그대로에 기초한다. 즉, 그대의 외적 행동은 그대의 내적 존재의 정직한 반영이다.
내가 말하는 겸손과 겸허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로, 체리, 아몬드, 포도를 들 수 있다. 체리는 겉은 매우 부드럽지만, 안에는 딱딱한 씨가 있다. 아몬드는 겉은 매우 단단하지만, 안은 부드럽다. 포도는 겉과 속 모두 매우 부드럽다.
체리 성격을 가진 사람은 겉으로는 매우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적으론 매우 딱딱하고 씁쓸하다. 누구도 이것을 모른다. 밖에서 보면 그들은 매우 우호적이고, 매우 다정하며, 매우 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가슴을 열어 비통함을 씻어내는 대신 원한을 숨길 때, 우리의 성격은 체리처럼 된다. 바바는 원한을 좋아하지 않는다. 겸손(modesty)은 나약함을 낳고, 위선까지도 낳는다.
이제 아몬드 성격은 겉으로는 매우 딱딱하지만, 안은 부드럽다. 그러므로 아몬드 같은 사람은 겉보기엔 매우 굳어 보여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안으로 사랑이 있지만, 겉으로는 매우 냉혹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에 너무 몰두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할 때 이렇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정말로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거짓된 자아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고 그 때 하나됨의 느낌을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바바는 다음의 예를 드셨다: 그것은 마치 소년이 자기 어머니를 ‘엄마’ 대신 ‘’내 아버지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녀가 그의 아버지의 아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대의 어머니를 ‘내 아버지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사랑스럽지 못한 일이다. 다음번에 우리가 외적으로 딱딱해지면,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실제로 반영된다. 이렇게 하면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도 성격은 겉이나 안이나 부드럽다. 가슴의 내적 부드러움은 밖으로 드러나고, 결과적으로 그대의 외적인 행동은 그대 내면의 정직한 반영이다. 이것이 정말 겸허한 것이다. 가슴이 그대의 행동에 반영될 때, 그대는 비러벳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있는 그분의 속삭임에 겸허히 순종하는 것이다. 행동에 가슴을 반영하는 것은, 그대를 강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제로 자신이 무엇인지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실을 의지하며, 숨길 것이 없다. 겸손함(modesty)은 결코 이것을 허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겸손함 속에서 그대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그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체리와 같을 수 있고, 가끔은 아몬드와 같을 수도 있고, 가끔은 포도와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에 있어 점점 더 포도와 같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겸손(modesty)이라는 이 주제에 관해, 바바와 함께한 우리 삶의 이야기를 하나 더 이야기하겠다.
우리는 1959년에 사타라에 있었는데, 당시 네팔에서 온 소년 두 명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데라둔에서 바바와 함께 있었었다. 그들은 만달리를 위해 주방 일을 하고 음식을 요리했으며, 바바와 함께 머물 수 있는지 그분에게 물었다. 바바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데라둔(Dehra Dun)에서 마하발레슈와르(Mahabaleshwar)로, 그 다음 사타라(Satara)로 왔다. 이 소년들은 같은 일을 계속했다. 알로바는 사타라의 주방 관리자였다. 그는 오전 5시 30분에그들의 방으로 가서 깨워서, 그들이 오전 6시까지 차 만드는 걸 마치게 했다. 그러면 바바가 만달리올에 오시는 6시 30분까지 우리는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이 소년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영화를 보러 갔다. 다음날 아침, 알로바는 그들의 방 문을 두드렸다. 소년들은 일어나서 차를 끓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해서 잤다. 그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오전 6시에 차는 준비되지 않았다. 알로바는 너무 짜증이 나서, 그들의 방으로 가서 문밖에서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마침내 그는 문을 찼다. 소년들은 일어났지만, 알로바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오전 6시 30분, 바바가 오셔서 우리에게 차를 마셨는지 물어보셨다.
우리는 차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마시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다. 이에 바바는 알로바를 불러서 왜 차가 준비되지 않았는지 물으셨다. 알로바는 “바바, 이 두 소년은 악당이에요. 새벽 5시 30분에 깨웠어요. 온다고 하더니, 안 왔더라구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펜두가 크게 말했다. “그들은 오지 않았지만, 당신은 매우 나쁜 행동을 했습니다.” 바바가 물으셨다. "그가 무슨 행동을 했는가?" 펜두는 말했다. "알로바는 이 소년들에게 소리를 질렀을 뿐 아니라, 그들의 방 문을 발로 차기도 했습니다." 바바가 알로바에게 얘기하셨다. “왜 그랬는가? 그들은 단지 새로 온 소년들인데. 그리고 그들이 왜 여기에 왔는가? 그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절대 그런 짓은 하지 마라.” 바바는 알로바에게 이 말로 문제를 마무리하셨고, 화제는 바뀌었다.
그런 다음 바바는 방갈로로 가셨다. 나는 알로바와 함께 바바를 따라 갔다. 그러나 우리가 방갈로로 걸어가면서, 알로바가 어떻게 소년들에게 잘 행동하지 않았는지를 계속 생각했다. 그 행동은 적절하지 않았다. 바바는 즉시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생각하면서, 알로바가 소년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행동하지 않았는지를 말해야 했다. 바바는 즉시 말씀하셨다.
“그럼 리시케시로 가라. 거기에는 많은 아쉬람이 있다. 간디 아쉬람으로 가라. 거기서 그대는 겸손함(modesty)을 발견하게 될 거고, 사람들은 그대의 겸손함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겸손이 없다. 그대가 누구고, 알로바가 누구든, 열려있다. 그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비록 그의 행동이 좋지 않았고 나도 그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는 겸손을 원하니, 저기 아쉬람들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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