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2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비러벳 바바를 만나기 전에 리시케시에 가고 싶었었다. 나는 영성이란 게 무언지도 모르고, 영성에 끌렸었다. 나는 21일 동안 물만 마시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긴 단식을 시작했다. 간디의 아쉬람과 나그푸르에 있는 스와미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의 아쉬람에도 갔다. 타주딘 바바의 무덤에 갔을 때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 후에 나는 리시케시에 있는 스와미에게 편지를 썼고, 그는 나를 그곳으로 불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바바는 내 삶에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리시케시에 가지 않았는데, 그동안에 내가 살고 있던 나그푸르에 비러벳 바바가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오시기 전에 나는 그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바바를 만났을 때, 나는 내 삶을 그분께 내어드렸다. 그분의 명령에 따라, 나는 마지막 시험이 끝난 지 3개월 만에 히말라야 무수리에서 그분에게 합류했다. 나중에 바바는 나를 데라둔에서 리시케시로 데려가셨는데, 특히 내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그곳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바바와 함께 리시케시에 갔을 때, 바바는 그곳을 가리키며 “이곳이 너의 리시케시다.”라고 나를 놀리셨다. 긴 법복을 입고 긴 머리를 한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더러움을 보면서, 나는 그곳의 아쉬람에 합류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스와미와 마하트마들은 진정한 영적 삶이 무언지 모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아쉬람에 있는 사람들은 영성에 대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한 규칙을 지키는 이상적인 삶을 따른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내적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마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영적 삶이 스승(마스터)의 명령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바바가 하라고 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 자아를 없애기 위한 적절한 치료법이기 때문에, 선한지 악한지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이행한다. 영적인 삶에는 정해진 패턴이 없다.
영적 수련생으로서 여러분은, 이상적인 삶이란 겸손(modesty)이라는 옷으로 거짓된 자아를 가리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을 유지하기 때문에 거짓 자아는 변하지 않는다. 영적인 삶에서는 거짓된 자아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삶은 소멸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삶을 사는 당신은 부자연스럽다. 당신의 외적인 행동이 당신의 내적인 존재를 정직하게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 당신은 점점 더 자연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당신의 외적인 행동이 점차적으로 당신의 내적 존재를 반영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겸손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부인이 아들을 낳다가 죽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키웠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한시도 버리지 않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락, 관광을 위해서나 어떤 변화를 위해 자신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걸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관광을 가자고 했더니 아들이 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른 풍경을 보여줄 계획을 떠올렸다.
“네 외삼촌이 여기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나보고 싶구나. 나랑 함께 가지 않겠니?
“물론이죠. 어떻게 아버지를 혼자 가시게 하겠습니까? 함께 갈게요.”
“그런데 당나귀가 한 마리밖에 없어요. 어떻게 둘 다 갈 수 있을까요? 저는 많이 젊으니 먼 거리를 걸을 수 있어요. 어려운 건 하나도 없어요. 저는 강해요.”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고, 이렇게 하면 아들이 변화된 풍경을 경험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들은 여행을 시작했다. 한참을 여행한 끝에 한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은 길을 따라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 좀 봐봐. 어린 소년이 옆에 걷는 걸 보며 자긴 당나귀를 타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아들이 걷는 동안 자기가 당나귀를 탔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아, 이제 네가 당나귀를 타라. 내가 잠시 걷겠다.”
사람들이 비웃었기 때문에 아들도 부끄러워서 동의했다. 아들과 아버지가 자리를 바꾸어, 이제 아들이 당나귀를 탔다. 그들은 더 멀리 가서 또 다른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왕자처럼 당나귀를 타면서 노인을 걷게 하는 저 청년은 대체 뭔가? 젊은이가 부끄러움도 없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둘 다 당나귀를 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더 멀리 가서 또 다른 마을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의 잔인함을 보라. 둘 다 당나귀를 타고 있는데 불쌍하고 멍청한 동물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
아버지와 아들은 당나귀를 너무 잔인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둘 다 걸어서 당나귀를 끌기로 결정했다. 이제 해가 거의 지고 있었고 그들은 또 다른 마을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또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들은 걸어가면서 당나귀를 끌고 가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저들은 너무나 무지해서 당나귀가 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네. 저들은 당나귀를 끌고 간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정말 혼란스러워졌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잔인함, 어리석음을 동시에 느꼈다. 그 마을을 지나갈 때, 아버지와 아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했던 모든 말에 압도되어 나무 아래 앉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성스러운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왜 여기 앉아 있나요?”
그들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성자에게 여행 첫날에 일어난 일을 말했다.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우리는 그에 따라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성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당신들이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도, 이제 당신은 혼란스럽고 부끄러워졌어요. 그들은 당신들이 잔인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당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그 말을 들은 건 당신의 약점입니다. 그러나 한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여행하면서 사람들의 말을 계속 듣는다면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거에요. 더 이상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당신 안에 계신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분이 당신을 제대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적 수련생인 그대가 비러벳 바바가 어떻게 재촉하는지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것이 그대들이 따라야 할 목소리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 속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자신에게 매우 솔직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욕망은 항상 그대의 마음 속에 있으며, 그들의 인도를 따르도록 촉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마음의 소리인지, 마음의 소음과 그 수많은 욕망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면 자신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여 거짓 겸손에 이끌리게 된다. 그러면 그대가 이끌게 될 삶은 단지 이상적인 삶일 뿐, 진정한 내면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적 수련생들은 또한 세상적인 우정과 진정한 우정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영적인 길에서의 우정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우정으로 이해되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나는 비러벳 바바와 내 인생에서 나눈 이야기 중 일부를 통해 이것을 일찍이 설명했다. 이제 나는 바바와 만달리 사이에서 관찰한 우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을 하나 더 이야기하겠다.
비슈누와 닐루 박사는 푸네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비슈누는 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후 바바에 합류했고, 닐루는 의학 교육을 마친 후 바바에 합류했다. 둘 다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은 친구였다. 그러나 바바는 거짓된 우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분은 진정한 우정을 원했다. 진정한 우정은 우정을 위해 진리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정직함에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바는 거짓된 우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우정을 원했다. 진정한 우정은 우정을 위해 진리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자신의 정직함에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닐루 박사는 바순디(basundi)라고 불리는 우유로 만든 특별한 과자를 좋아했다. 우유는 매우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끓인 다음 케샤르(사프란)를 우유에 섞는다. 비러벳 바바는 우리가 사타라에 있는 동안, 닐루가 매달 30루피 상당의 바순디만 먹을 수 있게 허용하셨다. 바바는 몇 달 후에 두 번째 사고가 일어나고, 닐루 박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닐루가 그토록 즐기던 이 간식을 허락하신 것이다.
한번은 월말이 되기 전에 닐루가 돈을 다 써버렸는데, 바순디를 너무 먹고 싶어 했던 일이 있었다. 비슈누는 물건 매매를 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돈이 있었다. 닐루는 비슈누에게 접근하여 말했다. “비슈누, 오늘 바순디를 갖고 와. 나는 돈이 없지만 3일 후 월말에 30루피를 받게 될 거야. 그 때 갚을게. 그러니 오늘 바순디를 좀 갖다 줘.”
비슈누는 바순디를 가져왔지만, 바바의 허락 없이 가져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찜찜했다. 그것은 좋지 않았다. 그는 매매를 위해 갖고 있던 돈을 그렇게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닐루는 한 달에 30루피 이상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비슈누는 바바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바바가 만달리들과 앉으러 오셨을 때, 닐루에게 물으셨다.
“이번 달에 바순디를 위해 얼마를 썼는가?”
닐루는 겁을 먹으며, “평소보다 조금 더요”라고 대답했다.
바바는 “그 돈은 어디서 났느냐?”라고 물으셨다.
닐루는 “내가 비슈누에게 물었고, 그는 주었습니다. 하지만 갚을 겁니다"
“나는 바순디에 30루피까지만 지출하고, 그 이상은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왜 돈을 더 썼는가?”
바바는 그렇게 말씀하신 뒤 비슈누에게로 돌아섰다.
“왜 그에게 바순디를 사주었는가? 그가 네 친구이기 때문이지. 나는 그런 거짓된 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직해져라. 그런 일을 하지 말라. 또 그렇게 하면 잘 알다시피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부정직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나에게 그런 부정직한 일을 한다면 너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둘 다 집에 가는 게 좋다. 정직하라. 나의 지시를 진실하고 성실하게 따르라.”
다른 사람이 비슈누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면, 바바의 허락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닐루를 위해 그렇게 했다. 닐루가 그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바바에게 고했다. 바바는 항상 진실을 원했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에게 호의를 구하거나 누구에게도 베풀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우정의 약점이다. 진정한 우정은 지속되지만, 거짓 우정은 사람을 망치고 약점이 계속 유지되도록 허용한다.
세상에는 친구들이 서로 사적으로 관계하고, 서로를 위해 호의를 베풀고 심지어 거짓말도 한다. 때때로 그들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해로운 행위를 저지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다. 진정한 우정은 비슈누가 닐루에게 그랬던 것처럼, 진실을 향해 서로를 돕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신탁 재산의 업무 상황에서 우정에 관한 세속적인 태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업무와 분위기를 망칠 것이다. 친구의 편을 드는 것은 없어야 할 선호(편애)를 만든다. 보다시피, 비러벳 바바는 우리가 그러한 우정을 갖는 걸 원하지 않으셨다. 세상이 아는 우정과 하나됨의 느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디. 하나됨의 느낌은 진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진실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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